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samye-monastery-religious-fresco-740.webp]] || || 티베트 불교를 정착시킨 (左) 샨타락시타, 구루 빠드마삼바와, 티송 데첸 왕 (쌈예 사원 내 벽화) || 티베트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5세기경 28대 하토토리넨첸 왕(lha tho tho ri gnyan btsan) 때이다. 토착 전설에 따르면 왕은 도대시마똑 육자진언과 금으로 된 탑을 선물 받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밀스럽게 왕궁에 모셔 공양 올렸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기록은 7세기 [[손챈감포|송첸 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05-650)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8세기 티송 데첸 왕(Khri srong lde btsan, 755–794)이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타락쉬타(Śāntarakṣita)와 티베트에서 '제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인도로부터 초빙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벳에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다. || [[파일:A_grand_view_of_Samye.jpg]] || ||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 사원 ||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티벳에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 티벳에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 양자의 수용 여부를 두고 왕과 왕비, 귀족 등 권력 집단 간에 이견이 있었다. 이윽고 티송데첸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562412576|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의 승려인 화상[*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 마하연(摩訶衍)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가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사원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까말라쉴라가 승리하면서 인도불교가 티벳에서 주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달리 20세기 초 돈황에서 출토된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에서는 쌈예 논쟁의 결과를 마하연의 승리로 기록하였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티송데첸 왕을 비롯한 당시 티베트의 권력층이 인도불교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http://naver.me/5oQ5EEV4|폴 드미에빌, 《라싸 종교회의》(배재형, 김성철, 차상엽 譯)]] [[http://naver.me/xNdZ2eRA|중암,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http://naver.me/xrPQScrt|왕석, 《돈오대승정리결》(김치온 譯)]] [[http://naver.me/F36XTTJc|박건주,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 쌈예논쟁 이후 인도불교는 티벳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고 불사불관(不思不觀)의 돈법(頓法)을 주장하는 마하연 화상(和尙)의 선종은 '하샹(ha shang)'의 가르침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의 족첸도 사캬 빤디타(Sa skya paṇḍita) 등에 의해 '하샹'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의심을 받으며 '중국식 족첸'으로 비판받았고, 까규의 마하무드라 역시 인도 전승의 마하무드라가 아닌 '중국식 족첸'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마하무드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33858|차상엽, 《싸꺄빤디따(Sa skya paṇḍita)의 마하무드라(Mahāmudrā) 비판》]] [[https://journals.ub.uni-heidelberg.de/index.php/jiabs/article/view/8564/2471|Roger R. Jackson, 《Sa skya paṇḍita's Account of the bSam yas Debate: History as Polemic》]] [[https://g.co/kgs/S9YJD5|David Jackson, 《Enlightenment by a single means : Tibetan controversies on the "self-sufficient white remedy"(dkar Po Chig Thub)》]] || [youtube(aHw9Ijit_XU)] || || 안성두 서울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서울구도회 강의 《티벳 불교의 이해:삼예사의 논쟁과 그 의미》 || 티베트는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또한 티벳 문자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역경할 목적으로 인도 [[데바나가리 문자]]를 본따 창제되었고, 티베트어역 경전은 충실한 직역이라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왕가의 후원 하에 대대적으로 역경을 한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 아비달마, 《현관장엄론》계열의 바라밀 전통, 중관과 유식의 제 논서, 불교논리학(인명학), 밀교 등 인도 대승불교의 거의 모든 전통들을 받아들여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현교, 대승밀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교학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7077.jpg|width=400]]}}} || ||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티샤[*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호법존 비사문천(Vaiśravaṇ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 || 또한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인도를 오가는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 예컨대 린첸상포(Rin chen bzang po, 958-1055)와 마르빠(Mar pa chos kyi blo gros, 1012-1097)와 같이 구법을 위해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와 불교 문헌을 수집하고 인도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반대로 인도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의 확장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넘어온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 982-1054) 같은 인도인 스승들도 있었다. 836년부터 842년까지 집권한 랑다르마 왕의 폐불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극심한 후퇴를 겪게 된다. 폐불 이후 2세기 간의 불교 암흑기를 거쳐 11세기 초에 이르러 예세 겐 부자의 불교 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1042년 아리 왕의 아들 예쎼외가 인도에서 아띠샤를 초대한다. 아띠샤는 티베트에서 《보리도등론》 등을 저술하며 17년 간 티베트에서의 포교로 까담빠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3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인도로 진출하자 인도 불교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무슬림은 이교도인 불교와 힌두교를 박해하였는데, 힌두교와 달리 출가 승단과 재가 신도의 구분이 명확했던 불교는 승원이 파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쇠멸한다.[* 그 밖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 인도 각지에 있던 불교 승가 공동체는 티베트, 네팔, 남인도로 흩어졌다. 이 때 승려 상당수가 경전을 가지고 티베트로 피신하면서 위끄라마쉴라 사원에 있던 교학, 조직, 전적이 그대로 티베트로 옮겨졌고, 당시 승려들이 갖고 온 전적(典籍)들은《티베트 대장경》의 기원이 된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의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티베트 불교도들 스스로도 인도 최대 불교대학인 '''날란다(Nālandā)사원과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의 학통(學統)과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qkFOK7OFos)]}}} || || 다큐 《Indian Roots of Tibetan Buddhis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MC6w8wN3nY)]}}}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YgazKTQEME)]}}} || ||<-2> 차상엽 경북대 동서사상연구소 전임연구원, 대한불교진흥원 헬로붓다 아카데미 "뿌리는 같아도 다른 꽃이 핀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사상》 1, 2부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